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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전에 학교사무원들의 차접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요지는 학교 사무원 (특히 여성)분들이 담당업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학교에 손님이 오거나, 학내 행사때 커피 등 차접대를 관행적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학생들에게 '도덕'적인 부분을 가르치는 선생들조차도 이러한 관행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거의 안한다는 것이였다. '당연히' 학교 사무직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 나서 반응은 잠깐동안이나마 대단했다. 당사자들인 사무원들은 그런 관행은 완전히 폐지되어야된다며 흥분했고, 많은 사람들도 "자판기 갖다놓고 쓰면되지 꼭 여직원이 타와야 하나"등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부는 "요즘 직장 갖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정도 가지고 투덜대냐" "그럼 나이 많은 교장선생님이 커피 나를까"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학교 사무원으로 있는 후배나, 선생님으로 있는 후배들을 대하면서 모두 1년전의 상황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사무원 업무분장에 '내빈 접대'라는 항목이 완전히 사라졌는지, 또 인권위측에서 (당시에는 사례가 없다며 조치해줄 수 없다고 응답) 1년 사이 교육청 등에 어떠한 지시를 내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후배들과 사이버상의 친구들과의 이야기속에서 여전히 행사때 (극히 소수일지 아니면 다수일지 몰라도) 여 사무원들은 '차'를 나르고, 선생님이란 직업을 가진 분들도 (직접 시키지는 않더라도) 그 부분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않고 생활을 해가고 있었다.

 

'차'를 접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개인적 친밀감이나 '조직'이 모두 '동질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무난히 이뤄질 수 있다. 이분화된 조직의 성질속에서 한쪽은 일방적으로 누군가를 '접대'하고 '준비'하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기반으로 '대화'하고 논의를 한다면 그건 분명 부당한 것이다.

 

간혹 TV속에서 정규직 직원이 계약직 직원에게 "커피 부탁해요"라는 대사가 나왔을 때 어이가 없을때가 많았다. 그 방송을 보는 사람들중에 이제 막 회사에 취업하는 이도 있을테고, 그와 유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런데 방송전파를 통해 그것을 일반화시키면 어쩌라는 것인지.

 

같은 부탁이라도 상황을 봐가며 하고, 상대를 봐가며 해야 한다. 학교든 회사든 여직원들이 차를 접대하러 들어가지는 않았을것이며, 회사 차원에서 그것때문에 뽑지는 않았을것다. (만일 그런 의도로 뽑았다면 그 회사는 뭔가 큰 문제가 있거나 조직이 언제가는 붕괴할꺼다)

 

작년 그 글을 쓰면서 '차 접대'의 문제는 이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 사람의 '급'을 규정짓는 기준을 이런 것으로부터 하나하나 만들고 인지시키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때문에 어떻게보면 '차 접대' 등의 소소한(?) 문제부터 해결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뭐든 부당한 사례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행하게 만드는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에.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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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책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쓰여졌음을 은연중에 내보이는 방법중에 하나가 책명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카페' '산책' '하룻밤에' 등등.. 이 책 역시 그러한 의도일 것이지만, 동시에 그 의도에 가장 잘 부합하게 글을 썼다. 저자 황주홍교수는 가볍게 그러나 나름대로 상세하게 이 책을 써나가고 있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6명의 미래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황교수의 간단간단한 코멘트가 연결되어 있다. 마치 강의를 하는 것처럼..황교수가 소개하는 학자들은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앨빈 토플러, 새뮤얼 헌팅턴,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비롯해 경영학도들에게는 친숙한 피터 드러커 그리고 다니엘 벨, 폴 케네디가 그 사람들이다. 설사 이들을 몰라도, '제 3의 물결' '문명의 충돌' '단절의 시대' '이데올로기의 종언' '역사의 종언' '강대국의 흥망'등의 책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책들의 저자들이다.

 

미래라는 것이 학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점술 등을 통해서도 미래를 점쳤는데 '흐름'을 통한 점쟁이가 되는 것 역시 그다지 나쁜 것은 아닌 듯 싶다. 이들이 말한 미래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흐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일반화되어 있기에 우리가 못 느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불확실하기에 불안하고 동시에 희망적이며 투자할 가치가 있는 미래에 대해 이들은 '단정적'으로 확신하며 말한다.

 

사실 이 책은 사기치기 용이한 내용들로 차있다. 어찌면보면 '대학생이 읽어야 하는 필독서 0권' 등에 자주 등장하는 저 위의 책들을 사실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은 드물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어디서 줏어들은 내용들도 읽은 양 - 혹은 너무나 많이 저 책들에 대해 들어서 스스로 착각할런지도 -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런 이들을 위해서는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는 '사기서'다. ^^. 하지만 동시에 친절한 설명서이기도 할 것이다. 저들의 책들을 모두 읽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미래적 감각'을 지닌 이들에게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후쿠야마의 트러스트를 읽을 때, 지리하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 이것이 왜 필독서로 되었고, 과거 내 대학때 어느 교수의 침튀기는 극찬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뻔한 이야기를 지리한 설명로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역사의 종언이후 올라간 후쿠야마의 이름에 그냥 편승되어 나온 책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론적으로 황교수의 '미래학 산책'을 한번쯤은 흟어볼 만한 책이다. 적어도 졸만큼 지루하거하지는 않다. 도리어 옆에 필기도구를 꼭 지참하고 봐야할 책 중에 하나다. - 단 출판사가 마음에 안 들었다. 조선일보사.....사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서점에서 그냥 보기에 적절하다. 아니면 빌리거나..^^;;)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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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도 그랬지만 이번 마호메트 만평 사건은 어떻게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국제문제에 대해 둔감한지 새삼 느끼게 해줬다.

 

'마호메트 만평' 사건은 문명간 충돌로 유럽과 중동, 미국 등은 '제 3차 대전'으로 확산될 수 있는 가장 가능성있는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다. 실제 세계인구의 3분의 1이 믿는 종교를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아래 수치심을 안겨줬으니, 문제가 커질 법도 하다.

 

언론의 자유는 뭐든 맘대로 써도 된다는 자유가 아니다. 전체 질서를 유지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지키고자 하는 공공의 성격을 지녔을때 부여되는 자유다. 유럽 언론들의 입장을 만일 그대로 적용시킨다면, 우리나라 언론들이 유럽 언론인들 개개인의 사적인 이야기 - 심지어 그 부모를 욕하더라도 - 아무 말도 못한다는 소리다. 왜냐면? 언론의 자유니까. 하지만, 만일 이렇게 한다면 난리가 날꺼다. 우리나라 언론에 대고 저급이라느니, 쓰레기라느니 욕을 할것이다. (물론 정말로 이런 일은 안 일어날꺼다).

 

하지만 지금 '마호메트 만평'은 이렇게 일어나지 못할 일이 일어난 경우다. 16억 인구의 숭배자를 욕하고 짓밣은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잘못 적용해서 말이다.

 

이제 돌어와보면, 이런 엄청난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니 그전에 이러한 사건을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우리 언론들은 어떨까.

 

각 언론사사이트를 비롯 포털의 뉴스사이트의 며칠간 메인을 보면 이 뉴스를 주요사건으로 제대로 처리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내가 놓쳤는지는 몰라도, 그나마 많이 본 기사 등에 걸린 내용은 알카에다가 만평 작가들에게 100만달러의 현상금을 내건 내용이나 어제인가 파키스탄 내 우리 기업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정도다.

 

그리고는 거의 안쪽에서 '국제'를 눌러 밑으로 조금 보다보면 나오게 된다. 사실 국제부분 뉴스를 다룰때는 우리 언론들은 크게 세가지 정도에서 빙빙돈다. (물론 간혹 이탈도 하지만).

 

첫째는 미국이야기다. 미국의 흐름이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대해 이견은 없지만, 다른 국제문제와의 비중을 따졌을때도 너무 과민하게 반응함은 물론 세세하게 파고 들어간다. 미국내 처음 들어보는 연구소에서 어떤 발표를 하게되면 그게 마치 상식이 되는야 보도한다. 그러다보니 어느때는 커피가 건강에 좋다가 어느때는 독약으로 변하고 만다. (과하면 뭐든 안좋다는 우리 선인들의 말씀대로만 하면 이런 연구는 필요도 없다.)

 

두번째는 토픽성 이야기다. 최근만 해도 베트남에서 33년간 한번도 안잔 농부의 이야기라든가 나이 먹은 유럽인이 태국에서 10대 소녀들을 데리고 살았다든가 하는 흥미나 자극성 이야기들로만 판이 친다. 다소 어이없는 것은 대부분 동남아나 제3국가가 이런 류의 이야기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우리와 정치 경제적 이슈로 첨예하게 대립될때이다. 물론 이런 때야 당연히 보도가 되야 하지만, 평소에 이름도 몰랐던 어느 한 일본 정치인의 망언을 보도하면서 그 사람이 어느정도 위치의 중요한 사람인지 지면소모를 해가며 이야기를 해대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마치 국민을 흥분시키려는 목적만이 존재하는 듯 싶다. 즉 오랫동안 국제적 흐름을 제시하다가 우리나라가 어떻게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는지 꾸준히 제시해주기보다는 냄비근성처럼 확 한번 타오르다가 다시 식을때쯤이면 다시 미국이야기나 토픽성이야기로 끌고가는 패턴을 보인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 국민들도 국제문제에 대해서 둔감해질 수 밖에 없다고 난 생각한다. 16억의 인구가 분노하고 다시 몇 억의 인구가 이에 대치상태로 있어도, 우리 국민에게는 별개의 문제로만 인식한다. 대한민국내 10여만명으로 추정되는 무슬림들만 흥분하고 있을 뿐이다. 하긴 언론사 기자들조차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면, "자 이 그림이 그 그림이요"라며 마호메트 만평사진을 그대로 신문 혹은 인터넷에 게시해 내보냈다가 몇몇 무슬림들의 '항의성 요청'에 의해 삭제 혹은 수정했다.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 고민없이 글로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한번 보여주지 뭐"라고 제시한 것이다.

 

우리 원유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중동은 이슬람국가가 많다. 기준도 잣대도 없는 언론의 자유 들먹이다가 엄청 높은 가격의 기름을 사야될지도 모른다. (설마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경전이 헌법을 초월하는 이슬람국가이기에 가능하다) 경제적인 타격까지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뿐만 아니다. 중국과 일본이 대치상태로 가도, 중국이 대만에 시위성 군사훈련을 해도, 세계에 이름도 모르는 질병이 창궐을 해도 우리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도리어 샤라포바가 수영복 모델로 나섰다는 이야기나 할리우드의 어느 한 배우가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에 눈길을 돌리리곤 한다.

 

국내 문제도 머리 아픈데, 무슨 국제문제까지 진지하게 살 필요가 있나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과 과거 '집성촌'개념으로 끼리끼리 살다가, 이런 마을 개념이 사라지고 도시화가 되면서 겪었던 혼란스러움과 양극화현성을 떠올린다면, 조금은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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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텔레비젼에서 심형래 영화감독님의 파워인터뷰라는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된 이후 영화의 참패로 온 국민의 비난과 질타를 받아온 그지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전국민을 반성케 만들었습니다.

그가 '공룡쭈쭈'라는 영화를 만들었을때, 한국에는 전세계적으로 흥행한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가 상륙해 있었습니다. 국민들은 물론 영화인들까지 그의 영화를 쓰레기 같은 영화니 비주류 B급영화니 하며 우롱하고 심지어 그에게인신공격까지 해댔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때 쥬라기 공원을 보면서 왜 우리는 저런 영화를 못만들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수십년간 스크린 쿼터라는 울타리 안에서 돈되는 영화만 만들려고 하고 최고의 스타만을 고집한 영화계는 어차피 따라갈 수 없는 헐리우드식 영화라고 생각하고 현실에 안주할때 심형래 감독은 스스로 미국을 꺾어 보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공룡 쭈쭈 이후 13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영화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디 워 라는 영화의 흥행여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미국의 영화기술에 대적할 만한 사람은 제가 보기엔 심형래 감독이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 한편을 만들었다고 해서 제가 그를 높게 평가하고 영화계가 반성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는 말합니다... 디 워 라는 영화의 완성과 성공보다는 그러한 헐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기술을 보유한 것이 더욱 자랑스럽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수십년간 스크린쿼터로 국가가 보호해 주며 육성했던 영화계가 못했던 일을 심형래 감독이 13년이라는 단기간에 그것도 혼자 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심형래 감독은 호랑이를 잡기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미국영화가 호랑이라고 가정한다면 지금껏 국내 영화계는 국가에서 호랑이로부터 보호 해달라고 말만 했을뿐 누구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호랑이를 잡겠다고 생각하는건 어리석은 짓이라며 그런 사람을 바보라고 했습니다. 심형래 감독이 혼자 무기를 만들어 호랑이와 싸울 준비를 하는동안 영화계는 언제까지나 정부가 지켜줄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만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화계를 바라보면서 과연 언제까지 스크린 쿼터를 사수해 줘야 할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수십년간 스크린 쿼터로 인해 대미무역에서 손해를 본 것은 국민입니다.

하지만 반사이익을 누린것은 몇몇 스타급 배우들과 메이저 영화사들 뿐입니다. 그러한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언제까지 스크린 쿼터를 지켜줘야 하는 것입니까?

영화인 여러분( 영화인 전체가 아닌 몇몇 스타와 메이저 영화사)

이제 그만 국민들 밥그릇에서 숫가락을 빼주세요!!

그리고 1인 시위에 나서는 배우들이여 당신들 스스로 우리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에 못미친다고 말하면서 왜 출연료와 대우는 그들에 버금가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단지 스타라는 이유만으로 국민들에게 동정표를 구하기에는 너무 양심없는 짓 아닐까요??


/출처 : 미디어다음 아고라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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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본 첫 영화는 제목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홍콩영화였다. 부모님 몰래 친구들과 들어간 지정석도 없는 극장 계단에서 난생 처음 본 거대한 화면은 그냥 멍한 기분만을 느끼게 했다. 그 후 다시 찾은 극장에서 본 서편제는 내가 접한 현실이 아닌 화면을 통해서도 내가 눈물을 흘릴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무슨 영화배우나 감독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영화를 보는 것이 즐거웠고, 독서실을 간다는 핑계로 역 주변 동시상영극장을 일주일에 한번정도는 꼭 찾아갔다. 지정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편을 봤다고 쫓아내는 것도 아니었기에 같은 영화를 하루에 2~3번씩 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무슨 영화를 본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 <공각기동대>┃할리우드가 ‘존재’의 철학을 어설프게 말하다.

사실 스토리가 세세하게 생각나지 않는 상황에서 이번 실사판 을 접했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면서 실시간으로 머리 한 쪽으로는 원작을 떠올리며 스토리를 구분해 이어나갔다. 물론 이번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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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때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영화를 순수하게 즐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난 영화를 보러가기 껄끄러워졌다.

 

어느 때부터인가 영화는 기억의 대상이고 분석의 대상으로 변했다. 어느 감독에 대한 영화류를 따져야 하며, 상업주의 영화가 분명 관객을 끌어들이는 재미가 있음에도 왠지 극장 안에 발을 들여놓는 심정은 씁쓸하다. 길거리 가판대에서 집어든 영화관련 잡지도 손에 쥐기조차 무겁다. 한쪽 손에 든 가방보다도 질량적 무게감은 분명 가벼운데도, 심적 무게감은 이를 훨씬 상회한다.

 

 

“이 영화 정말 재미있지 않냐? 주인공이 그렇게 연기를 잘할 수가 없더라. 화면 역시 이쁘던데. 어쩜 그리 잘 만들었냐” 영화 관람 후 식사라도 하면서 이런 식의 말을 하면 이제는 무식하다는 말을 듣는다.

 

“영화의 콘텍스트의 흐름이 뛰어나던데. 주인공의 감정몰입이나 등장인물들의 시선변화는 특히 더 그렇고. 비주얼은 또 어떻고” 이런 식의 어설픈 단어나열이라도 해야 뭔가 아는 듯한 그리고 느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냥 그렇게 즐겁게 본 영화보다 왠지 해석하려는 이들의 평이 답답하다.

 

그러나 이들의 잘못이라기보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 그 영화를 해석한 수많은 일간지, 잡지, TV들의 문제는 아닐까?

 

“이 영화는 000감독의 작품 세계가 지속적으로 회귀하는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적인 공간으로 도약해간다.” 어느 잡지에 나온 평론의 일부분이다. 관객들은 이를 따라할 뿐이다.

 

사실 영화는 그냥 즐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감독들은 그 안에 수많은 메시지를 드러내 보이려 애쓰고, 이를 평론가들은 더 어렵게 해석하고, 관객들은 다시 ‘즐김’의 주체에서 점차 벗어나버린다. 오로지 웃음만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는 왠지 모르게 ‘저급’으로 취급되어 무슨 영화잡지에서 보여주듯이 매번 엄지손가락이 아래로 향하게 만든다. 즐기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일까?

 

 

왜 '터미네이터4'에서 터미네이터가 안 보일까

'터미네이터' 시리즈 중 비주얼로만 따진다면 가장 대작이라고 불리우는 4편 '터미네이터 : 미래 전쟁의 시작'(이하 터미네이터)은 평가가 갈린 것으로 보인다. 11일 언론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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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센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후편이다. 조금 오래전 영화다. 전에 같이 본 사람들의 중론은 나오는 대사만 대충 합해도 철학서적 한권은 나온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면 새로운 생각에 대한 몰입이 즐김일 수도 있다. 문제는 다시 그 생각을 풀이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어찌보면 이노센스나 공각기동대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또한 메시지 역시 간단하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매트릭스를 보면서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지금 실재하는 인간의 모습이 진짜 인간의 모습인가라는 질의가 영화의 중심생각이다.

 

<공각기동대>의 소좌가 아무도 자신의 뇌를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한 것이나 어느 책에서 언급했듯이 사람이 눈을 통해 비추는 감각의 영상이 아닌 실질적인 인간의 모습은 그 누구도 본 적이 없기에 인간은 허구라는 식의 논리를 지리한 책이 아닌 영화로써 접근한 것은 어찌보면 뛰어난 방법이다. 하지만 관객들 대다수는 그것에 그리 광분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보면 1990년대 유행하던 홍콩 느와르에서 주윤발이 천천히 등장하는 장면이나 유덕화가 멋지게 카드를 상대에게 던지는 장면이 더 마음에 와닿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영화는 관객에게 계속 알수 없는 질문던지기 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여타 문화도 그러하겠지만 영화는 지금 군림과 무거운 메시지 전달 그리고 사업의 측면에서만 논해지고 있지, 실제 그 영화를 즐기려는 관객의 입장은 돌아보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관객이 영화의 수준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에 영화의 수준을 정해놓고, 그에 따라 관객수준까지 결정짓는 시스템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무거운 메시지 전달은 마치 반드시 들어가야 할 옵션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틀 안에서 벗어나거나 어설프게 이 틀에 끼워 맞추려면 곧 사장된다. 물론 살아남는 방법도 있다. 일종의 외부로의 평가. 즉 외국에서 수상하고 들어오면 국내에서의 평가는 180도 달라진다. 이 때부터는 그 영화가 일종의 ‘틀’의 한 부분을 대체하게 된다.

 

현대에 와서 모든 의식과 개체들이 분석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무슨 독재시대 사상전파의 나팔수도 아니고 즐김의 대상이 되는 문화의 한 부분을 점차 의식화시키는 것은 되짚어봐야 할 문제다. 물론 특정의식의 전파 - 예를 들어 학교문제를 고발한다던가 하는 -를 위한 작업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아예 초반부터 상업주의적임을 표방하고 나선 영화들조차 기존의 사상적 잣대로 분석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싶다. 그리고 이런 작업에 ‘좀’ 안다는, 그리고 ‘제법’ 영화를 봤다는 사람들이 나서서 관객들의 ‘즐김의 권리’를 박탈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글래디에이터>에서 황제의 손가락의 방향에 따라 한 인간의 목숨이 좌지우지되듯 그들이 주는 별 몇 개와 손가락의 방향이 한 영화를 좌지우지하고, 다양한 관객들의 성향을 몇 개의 층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난 과거 중학교때 본 영화를 계속 떠올리려 노력하지만 내용이 기억이 안난다. 1천원짜리 동시상영극장에서 몇 번에 걸쳐 본 영화들인데도 말이다. 그러나 느낌은 분명 살아있다. 대낮에 몇 명 안되는 사람과 같이 보면서, 혹은 주말에 계단에 앉아서 무엇인지 모지만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으로 저려오는 가슴의 느낌은 손에 잡힐 듯 남아있다. 영화를 보면 어느 새 따지게 되는 지금의 나로서는 다시는 느끼기 힘들 듯 싶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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