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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도공사측과 KTX여승무원들의 싸움이 해법이 안보인다. 결국은 이 땅위에 모든 비정규직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히 이들만의 문제라고 보기 힘든 상황으로까지 왔다. 한쪽이 무을 꿇는순간 비정규직문제의 해법에 하나의 선례가 남기때문에 이번 싸움은 더더욱 관심을 끌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 싸움을 보는 우리는 감정적으로 이들을 동조 혹은 비판할 수 없기에 이들이 제시하는 근거와 숫자자료에 일단 마음을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된다.

 

철도공사에서 제시하는 "이들 여승무원들의 봉급이 우리 6급 1호봉보다 4만원 많다"라는 주장을 듣다보면 왜 여승무원들이 파업할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여승무원들이 "틀렸다. 수당은 왜 포함 안시키고 말하냐"라고 하면 정신이 없어진다. (이에 대해 한 네티즌은 정규직 6급 1호봉이 200여만원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이런상황에서 철도공사에서 산출하기 어려운 내용을 산출해서 놀랐다. 현 KTX여승무원들 모두 자르고 운행해도 승객들에게 돌아가는 실제 할인율은 200원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산출했는지 몰라도 듣는 이에게는 "200원 할인폭의 가치밖에 없는 여승무원"으로 들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들을 왜 채용을 했을까. 공사측은 국민들의 정서때문에라고 한다. 기업 운영을 해보지 않아서 그랬던 것일까? 국민들의 정서를 그렇게 잘 아는 철도공사가 엉뚱한데 유전개발같은데 투자를 하는 것일까? 국민들은 어디까지나 본분에 의해 충실히 철도관련 업무에 치중해 안전한 운행만을 바란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여승무원의 가치에 대해 있으나마나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도 우습다. 정작 KTX사고나고 내부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봐야할까? 지난해 이맘때 지하철 화재사고후에 내부에 안전요원을 둔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런데 최근에 본적이 없는 듯 하다. 또 무감각이고 사고가 나지 않자 대충 넘어가자는 것이다..

 

확대하면 비정규직의 문제이고, 이 사회의 문제이지만. 계획도 없이 인력운용하고 문제 생기자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비하해버리는 철도공사를 (궁극적으로는 정부) 우리는 어디까지 믿어야 하고, 이들이 운행하는 KTX가 정말 안전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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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 2기 집행부가 출범했다. 작년인가 1기가 출범할 때, 참 말들이 많았다. 언론의 '한총련 산하단체'라는 어이없는 발언으로 인해 순수하게 고등학생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이들의 움직임은 시작도 해보기 전에 제동이 걸렸다.

 

의장으로 뽑힌 학생은 경찰에 2번이나 불려가고, 대의원이였던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가입경위를 추궁받거나 탈퇴를 요구받았다. 그덕에 중간에 많은 멤버들이 빠져나갔다. 이들이 주장하거나 요구하는 것이 반사회적인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내세운 잣대는 오로지 '어른들의 시각' 즉 "우리가 하라는대로 하지 않는 너희들에게 가르침을 주겠노라"수준이였다. 거꾸로 어른들이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였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3개여월동안 이리저리 불려다니냐고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있다가, 이제 다시 제대로 활동하겠다고 2기 집행부가 출범을 한 것이다. 지난해는 만들어지고 이제 진짜 사회에 자신들을 알리는 2라운드를 들어간 것이다.

 

사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이미 10여년전에, 아니 그 이전에 많은 고등학교 학생회에서 요구했던 사항이다.

 

두발자유화부터 시작해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해 달라는 것, 학생은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기에 동아리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그리고 이들 학생들의 권익을 요구할 수 있는 대표집단인 학생회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인터넷 세대가 되고, 자유로운 주장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도 고등학교내 학교와 학생의 관계는 그대로이고, 10년전 주장은 그대로 지금도 살아있다.

 

사회에서는 말한다. "지금 고등학생들 까져가지고, 솔직히 우리때와 비교하면 자유롭지 않냐". 맞다. 까지고 자유롭다. 하지만, 학교측으로부터 받는 사고의 억압과 제도의 탄압은 그대로다. 또한 그 까지고 자유롭다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어른이 되어버린 이들이 세운 것이다. 1970년대 학교 다닌 사람들은 안 까졌었나? 그 시대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버릇없기는 마찬가지다. 기준을 어디다 세우냐에 따라, 시각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이들중에는 정말 사회 보편적인 시각으로도 이해안되는 학생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대표성을 갖지는 않는다. 다수의 학생들은 아직 학교와 집을 오가며 대학이라는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 (누구의 바램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한다.

 

신기한 것은 지금 고등학교 선생들이다. 비록 현재 주류는 아니겠지만, 20대말 30대초반의 선생들은 이런 부당함을 느끼고, 항의했던 세대인데 지금은 그때의 선생들과 닮아가고 있다. 대한민국 사범대학 교육은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하긴, 현재의 사범대학은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을 길러내는 것이 아닌 교사라는 직업인을 만들어 내는 공간이 되어버렸으니)

 

한고학연 2기 집행부들을 보면서 그들 스스로가 그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찾기위한 몸부림이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는 단순히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에서만의 움직임이 아니라, 이후 그들이 20대가 되고, 30대가 되었을 때, 사회를 움직이는 중심이 되었을때, 이 사회의 부당한 것에 항의하며 다시금 '권리'를 찾기 위한 (물론 이에 따른 의무도 충분히 이행하며) 성숙한 시민으로 변해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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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성폭행.성추행사건 잇따라
여아 수십차례 성폭행한 10대 구속
찜질방성 20대 여성 성추행
취직미끼 모텔유인 성추행
여고생 한달새 3번 성폭행 당해
'성폭행 위로해주겠다'며 여중생 성폭행
고교생이 초등학생 성폭행
친딸 성폭행 30대 미수
여자승객 성폭행 택시기사 영장
동거녀 초등생 딸 3년째 성폭행
채팅으로 만난 여중생 성폭행
10대 조선족이 새벽길 귀가여성 성폭행
초등생 성추행 스리랑카인 구속
찜질방서 초등생 성추행
술취해 장애인 성추행 60대 구속
무허가 어학원 원장이 여중생 성추행

 

잠깐 흝어본 연합뉴스 기사 제목이다. 사실 보도를 하는 것도 좋지만, 왜 이런 보도를 끊임없이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렇다면 심층적인 보도를 몇 차례 내보내는 것이 더 낫다.

 

위의 단순 제목들은 통신사라는 성격상 달린 것이지, 저 내용들이 각 언론사와 포털에 가면 제목은 더욱 더 자극적으로 바뀐다. 또 저런 기사들이 '많이 본 기사'등에 너무나 올라가 있다.

 

언론들에게 묻고싶다. 과거에는 저런 사건들이 없었나? 전국에 경찰서에 접수된 내용만 수십건 이상일 것이다. 특히 1차 보도에 여념이 없는 연합뉴스는 국가기간통신사로서 저런 어이없는 기사를 계속 내보내야 하는지 묻고 싶다.

 

세상 흐름을 타서 네티즌 혹은 독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내보내는 기사라면 당장 중지해야 한다. 저런 기사는 "어 저런 행동은 해서는 안되겠네"라는 생각보다는 "나도 한번~"이라는 생각을 더 쉽게 가지게 한다.

 

저런 행동은 '당연히' 해서는 안된다. 굳이 기사로 내보내 경각심을 일깨우지 않아도 정상적인 사람들이면 '하지 말아야' 할 짓으로 이해한다. 도리어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성적 자극만 건들릴 뿐이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이 쓰레기통처럼 비춰지게 만들 뿐이다. 사람에 대한 의심과 불신만을 키울 뿐이다.

 

기자들이여, 경찰서에 나가 사건일지 보면서 성범죄는 이제 넘어가길 바란다. 세상에 기록해야 하고, 비판해야 하고, 써야할 내용들은 수없이 많다. 정신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3류 포르노'식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게 할 여유가 있다면 매년 쓸데없이 낭비되는 세금이나 하나하나 파헤치는 등 진정 바꾸어야 될 내용을 기록하는 '기자'의 행동을 하기 바란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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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면 한 칸 양 옆에 6자리씩 12개의 자리가 노약자석으로 되어있다. 그 자리는 노인 (대략 65세이상), 장애인, 임산부 등을 위해서 마련된 자리다. 그런데 지하철을 아침저녁으로 타다보니 그 자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생각의 발단은 후배가 "노약자석을 없애면 안될까"라는 말을 하고부터이다.

 

며칠 전이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한분이 지하철에 타셨는데, 그 위치가 지하철 한 가운데였다. 노약자석을 제외한 나머지 자리에는 모두 승객들이 앉아있었다. 할머니가 타시자, 자거나 자기만의 일에 심취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노약자석쪽을 힐끔힐끔 보기 시작했다. (차량안에 서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노약자석이 빈 것이 그냥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도 노약자석으로 발을 옮기셨지만, 차량의 움직임때문에 쉽지 않았고, 결국 한 학생이 자리를 양보했다.  그리고 그 학생은 그대로 서있었다. 나머지 승객들의 표정은 그제서야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후배의 주장을 옮겨보자 "한 가지 상황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 상황은 모두 무언의 '공범' (구체적으로 죄가 뭔지는 모르지만)이 된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노약자석. 그자리가 지하철내 사람들의 심리적인 안식을 주기도 하고, 동시에 갈등도 주며, 또한 동시에 불안감을 주기도 하는 자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다고 그 자리가 법적으로 반드시 노약자가 앉아야 된다고 규정되어 있지도 않다. 단지 우리나라 미덕의 차원에서 마련된 자리고, 뻔뻔한 젊은이가 버티고 앉아있다고 해서 신고할 수도 없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존재해 일순간 사람들에게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노약자석을 제외한 모든 자리에 사람이 앉아있는 상황에서도 그 자리는 앉기가 꺼려진다. 자리에 앉더라도 불편하다. 매번 문이 열릴때마다 쳐다보게 된다. 그래서 아예 서서 가게된다. 물론 젊은 나이이기에 서서 가도 무리가 없다. 그런데 내 몸이 조금 안좋더라도 그 자리는 여전히 심리적 벽이 쳐져있는 듯 하다.

 

후배은 다시 "노인분이나 임산부, 혹은 어딘가 다치신 분이 타면 대부분 자리를 양보합니다. 굳이 노약자석이라는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노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도 말할 수도 있지만, 법적으로 강력하게 규제하는 것도 아니고, 상시 누군가가 그 자리를 지키고 규제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내 후배를 욕할 것이다. 과거 전에 어떤 신문 독자투고에서 "지하철에 사람이 만원이라도 노약자석이 비워있어야 아름다운 모습일 것 같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조금 힘들더라도 젊기에 노약자석은 누군가를 위해 비워놔야 한다는 주장과 "노약자가 타면 당연히 자리를 대부분 양보하기에 굳이 선을 그어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비워놔야 하는가"라는 주장 사이에서 얼핏 간단한 것 같지만 선뜻 답을 내리기 어려운 이유는 왜일까.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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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는 우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계몽하고 영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그런 목적으로 사용해야합니다.
그러진 않는 한,
TV는 바보상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굿 나잇 앤 굿 럭.

- 굿 나잇 앤 굿 럭 中 ‘에드워드 머로우’ -

'굿 나잇 앤 굿 럭'...영화에 대해 잠깐 소개를 해야겠다.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 초반이다. 레드 콤플렉스가 미친 듯이 세상을 뒤집던 시대다. 미국의 조셉 맥카시 상원의원의 어이없는 발언들과 행동으로 사람들은 숨죽이며 살아야했고, 진실을 기록하고 말해야 하는 언론들 역시 자신의 펜대를 부러뜨리고 혹은 목소리를 죽여가며 보도를 했던 시대였다. 이영화는 이때 이런 매카시즘에 맞서 언론의 힘을 보여줬던 에드워드 머로우 뉴스팀의 이야기를 그렸다.

 

우리는 TV를 바보상자라 부른다. 능동적으로 정보를 습득해야 하는 글쟁이들의 공간인 신문과 잡지와는 다르게 TV는 수동적으로 있어도 모든 정보를 아주 다이나믹하게 사람들에게 주입시켜준다. 때문에 아차하고 스스로의 정신을 놓는순간 시간 가는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이런 '바보 상자'인 TV에 대해 머로우는 그것을 탈피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말이다. 우리가 바보상자가 아닌, 인간에게 유용하게끔 인간이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면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TV프로그램을 비판하지만, 실상 그 비판과는 달리 무의식적으로 흥미만을 쫓고 있다. TV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길 바라지만, 그 무엇인가에 대한 선택권을 스스로 가지려 하지 않고, TV프로그램 제작자에게 맡기고, 다시 그것을 비판한다. 철저히 수동적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TV의 영향 등이 아닌 '진실을 말하는 용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인 변화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TV저널리즘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솔직히 영화평을 잘 할 줄 모르는 내가 이 영화의 시사회를 보고와서 이렇게 끄적이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1950년 초반'의 논리와 주장이 신기하게도 '2006년'의 상황에 적용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TV저널리즘의 영향력과 폐단에 대해 작년 말과 올해 초에 절실히 접했다. 황우석 교수 사건이 그것이다. PD수첩과 YTN의 보도는 TV가 접근해야 갈 방향과 언론윤리가 어디까지 지켜져야 하는지를 일반인들에게 알려주었고, 그 영향력이 세상을 어떻게 이끌고 가는지도 보았다. 바보상자가 세상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영화가 1950년대 초반에 말한 '진실을 향한 힘'이 2006년에도 유효하다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우리가 TV를 어떻게 이용하고, 그 안의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 해석하는지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무의식적으로 그 내용에 이끌려 갈때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 일어나는 것이다. 때문에 TV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이가 진실에 어떻게 접근하고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의 중요성을 과거나 지금이나 무게감을 갖게 된다.

 

언론의 자유가 그 어느때보다 높아졌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다. 자본으로부터는 아직 그 자유를 허락받지 못했다. PD수첩때 광고가 떨어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MBC가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나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서 우리 언론들은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또 진실을 말하기 더더욱 어려워진 것은 '대중의 평가'다. 아직도 황우석교수 사건은 유효하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황교수가 펼쳐놓은 무의식의 굴레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진실'을 말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1%의 거짓이 99%의 진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진실'에 접근하는 용기에 대한 평가가 필요한 것이다.

 

'굿 나잇 앤 굿 럭'을 여건이 된다면 볼 필요가 있다. 매카시즘과 유사한 상황이 대한민국에서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영웅주의적 사상이 세상을 이분시키는 상황도 우리는 접해봤고, 한쪽의 입을 철저히 막는 상황도 접해봤다. 또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국민 전체가 혼돈으로 빠지는 상황까지도 접했다. 바로 1950년대 미국의 모습이고, 2006년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아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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